행동하는 목회자 '박형규' 목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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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목회자 '박형규' 목사 별세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6.08.19 18: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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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향년 94세 일기, 기장총회장(葬) 5일장으로 거행
▲ 민주화운동을 위해 행동하는 목회자의 삶을 살았던 박형규 목사가 93세를 일기로 18일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운데 각계인사들이 빈소를 찾고 있다.

행동하는 신앙을 실천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 박형규 목사가 향년 94세를 일기로 지난 18일 오후 5시 30분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된 가운데 5일장으로 거행된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기장총회는 최부옥 총회장을 위원장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발표했다.

18일 기장총회 주관으로 임종예배를 드린 가운데, 19일 오후에는 박 목사가 은퇴 전까지 시무했던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유가족과 교인,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입관예배들 드렸다.

장례기간에는 서울노회와 기독교빈민선교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생명선교연대가 주관하는 추모기도회가 잇따라 열리며, 장례예배는 기장총회 주관으로 22일 오전 9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상조회 묘원으로 결정됐다.

▲ 지난 19일 오후 분향소에서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추모기도회가 열려 고 박형규 목사를 추모했다.

9일 빈소에는 손학규 전 의원, 한국YMCA전국연맹 전 이사장 안재웅 목사, 경기도교육감 이재정 신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대표, 이재오 전 의원 등이 조문했다.

빈소를 찾은 추모객들은 민주화운동과 빈민운동, 인권운동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박 목사의 뜻을 기억했다.

고인이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4.19 의거 당시 쓰러져가는 민중들을 목격하면서였다.

박 목사는 생전 “어느 날 한 교인이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뛰어다니고 있다는 말을 해주어 현장에 갔는데, 실제로 그러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목사가 세상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하는 생각했고, 죽어가는 학생들 뒤를 따라가면서 많이 울었다”고 4.19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에도 박 목사는 1973년 기독교계가 참여해 반유신체제 시위를 계획하다 공안당국에 체포됐던 ‘남산부활절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과 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 등에 연루돼 6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특히 남산부활절사건 때는 자금을 지원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같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돼 방청객도 차단된 채 재판을 받았다. 결국 박 목사는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15년형이 언도됐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은 헛되지 않아 지난 2014년에는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헌재 판결에 따라 서울중앙지법은 재심 선고공판 끝에 무죄선고를 선고했고 검찰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처음으로 무죄를 구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편, 1923년생인 故 박형규 목사는 1950년 부산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1958 미 육군에서 근무하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1959년 일본 도쿄신학대학원,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1960년 기장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 1968년 기독교사상 주간을 거쳐 1972년에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년 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박 목사는 기장 1981년~1982 제66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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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 2016-08-24 06:52:14
너희들은 예수그리스도 구원론이 없는 이단, 적그리스도, 사이비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