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장 목사’된 까닭은 “더 잘 섬기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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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 목사’된 까닭은 “더 잘 섬기고 싶어서”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12.01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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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기네스에 뽑힌 주은당구클럽…꿈과비전교회 김영진 목사
▲ IMF의 타격으로 퇴직 후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성공적인 학원 경영으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드리는 시골 교회 장로님을 꿈꾸었던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에 목회자가 됐고 이제 당구장까지 경영하며 새로운 발상의 목회, 섬김의 목회를 실천하고 있다.

목회자가 운영하는 당구장이 대전에서 기네스에 올라 화제다. 대전의 최초, 유일, 최고, 독특함 등 4개 분야로 기네스를 뽑았는데, 김영진 목사의 ‘주은당구클럽’이 독특함 부문에서 기네스에 뽑힌 것. ‘주은’은 ‘주님의 은혜’라는 뜻(건물이 주택은행에서 지어서 주은오피스텔이지만 김 목사는 당연 ‘주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

담배를 꼬나물고 자욱한 연기 사이로 큐대 질을 하는 사람들과 그 뒤에 먹다 남은 짜장면과 내기 돈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는,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아지트로 삼는, 그런 당구장으로 생각하고 이곳의 문을 연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고난도 축복도 주님의 은혜
금연당구장인 이곳은 쾌적한 환경을 자랑한다. 아빠가 두 딸을 데리고 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당구를 가르쳐 주는 곳이고, 부부가 함께 와서 다정히 당구를 치는 모습이 흔한 풍경이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등장하는 당구장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남는 수익금으로 교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시골교회를 돕기도 한다. 사실 처음부터 이 당구장을 운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아니, ‘당구장 목사’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 그는 참 간증거리가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그때는 힘들었어도, 되돌아보면, 모든 게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더라고요. 어려서부터 그래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할머니가 사시던 방 두 개짜리 월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죠.”

그가 ‘살던 집’은 안채, 아래채, 중간에 대청마루에 텃밭이 있고, 한가운데 마당은 축구를 할 만큼 큰 집이었다. 경주 김 씨 왕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고래 등 같은 집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사업이 망하면서 경주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그게 되레 은혜였어요. 겸손해진 것이죠. 우리 집안이 전부 불교집안이었는데, 제가 처음 아홉 살 때에 교회를 다닌 이래로 지금은 전부 기독교 집안으로 바뀌었습니다. 형도 지금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면서 집안 형편도 좋아졌죠.”

주님의 은혜로, 잘 나가는 샐러리맨이 됐다. 90년도 엘지가 야구단을 창단했을 때에 매니저 겸 운영과장으로 몸을 담았는데 그해 바로 우승을 했다. 대구 구장에서 헹가래를 탔던 짜릿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IMF가 닥치면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부장 네 명 중에 한 명이 그만 둬야 했는데, 제가 제일 젊었어요. 아이들도 어렸고요. 기도 가운데 제가 희생하자는 마음이 생겨서 회사를 그만 뒀죠. 그런데 업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음악학원이 부도가 나면서 전세금을 다 날렸습니다. 자산이 제로가 된 거죠. 제가 다시 취직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대기업에서 어린 나이에 부장 5년차까지 했으니 중소기업에서 저를 쓰기 어려웠죠.”

▲ 농촌교회 섬김의 자리에서


학원 경영해 재물 얻었지만
밤마다 교회 문고리를 잡고 기도하며 버텨냈다. 그래도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이 고난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은혜가 다시 임할 것이라 믿었다. 그는 이런 믿음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그때마다 복된 길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한다.

“교회 전도사님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학원을 해보라는 겁니다.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일주일 후에 누가 학원을 사라고 연락이 왔어요. 돈도 없었는데 아는 교우께서 자기 이름으로 대출도 해주시고요. 그래서 학원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생이 60명이었던 학원은 그 이듬해 3월엔 180명, 그 다음 해에는 900명으로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엘지 근무 시절에, 엘지가 럭키금성에서 사명을 바꾸고 ‘사랑해요 엘지’라는 고객 중심의 가치를 창조하던 일을 기획했던 그는 학원 경영에서 그 기획을 적용했다. 학부모의 눈높이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자 학원은 나날이 성장해갔다.

“교회에서 제일 십일조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죠. 당시에 어려운 시골교회에 봉고차나 피아노도 많이 사드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교만했던 것 같아요. 언제든지 돈을 벌면 사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학원을 네 개나 경영하면서 아내와 얼굴 볼 시간도 없었고요. 돈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나이 55세 되면 시골에 가서 장로로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잘 살자는 약속을 아내와 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모든 재산이 아내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었고 두 아이는 미성년자라서 처갓집에 후견인을 만들어 동의를 받아야 그가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아내를 화장한 뼛가루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옹기를 납골당에 넣고 돌아서자마자 처가에서 돈 이야기가 나왔다. 갈등도 심했고 실망도 컸다. 그의 재산 형성에 전혀 상관이 없었던 이들이지만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 물질의 덧없음을 절감케 됐다. 학원도 정리했다.

“교회에만 전념하게 됐죠. 섬기던 교회 목사님이 여수에 개척을 해서 거기 가서 2년 반을 섬겼어요. 그 과정에서 믿음이 자라게 됐고,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신대원에 입학해서 목회를 시작한 거죠. 2학년 때에 개척을 했습니다. 그때 평생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서원을 했어요. 저는 그래도 남은 자산이 좀 있으니까요.”

지난 추석엔 시골 교회 장로님 과수원을 찾아가 사과를 사서 교인들에게 한 상자씩 나눠줬다. 명절 때면 목사님께 뭘 대접하기도 하는 ‘풍습’에 역발상으로 접근했다. 어려운 시골교회도 돕고 교우들에게 선물도 주고, 일석이조의 기쁨이다. 

당구장서 예배의 삶을 산다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이중직 논란이 있는데요, 성도들은 열심히 일해서 교회 와서 섬기는데, 목사가 설교 같은 사역을 너무 크게만 볼게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의식구조로는 한국교회도 쇠퇴해가는 유럽교회처럼 될 겁니다.”

지금 당구장은 임대가 잘 안돼서 그 동안 관리비만 냈던 자리다. 작년 연말에 누가 당구장을 하겠다고 했다가 타산이 안 맞았는지 포기했는데, 이왕 관리비만 내느니 아예 당구장을 직접 경영하자고 나선 것이다.

“제가 78학번인데, 당시 학교 휴교령 때문에 많이 쉬었거든요. 그때 당구장에서 쌓은 실력이 300점인데, 이제야 그거를 써먹네요. 건전하고 깨끗한 당구클럽을 경영하면서 새로운 레저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었어요. 또 남는 수익금이 생기면 교회도 운영하고 농촌 교회들도 돕고 싶었고요.”

얼마 전엔 당구장으로 찾아온 후배 찬양사역자와 함께 농촌교회를 방문해서 찬양 집회를 열어드리고 동행한 간호사들이 의료적 혜택도 드리는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또 시골 농작물을 가져와 팔아드리는 일도 하고 있다. 그는 현재 신대원 때 소개로 만난 전도사님과 재혼해서 교회를 함께 섬기고 있다. 

“저는 당구장도 예배의 장소라고 생각해요. 손님들과 좀 친해지면 제가 목사라고 밝힙니다. 그러면 상담도 하게 돼요. 얼마 전엔 아내와 사별한 후 우울증 위험에 있는 박사님을 여기서 만나 상담해드린 적도 있어요. 이런 저런 일들이 알려지면서 이번에 대전 기네스 상을 받은 것 같아요. 이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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