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하늘처럼 깊었던 믿음의 선각자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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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하늘처럼 깊었던 믿음의 선각자들 "고맙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02.28 0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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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독교 유적지 순례, 한교연, 23~24일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 찾아

98년 전 3.1 만세운동이 일었던 당시 하늘이 이렇게 청명했을까. 봄이 온 것처럼 하늘은 맑기만 한데 살갗에 닿는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기미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전국에 만세운동이 번질 때만 해도 광복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대한독립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얼마나 후련했을까. 그리나 곧 서슬퍼런 일제의 탄압이 시작됐고 엄청난 희생이 이어졌다. 그 안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혀야 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시기 기독교 인구는 1.5%에 불과했다. 소수였지만 강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선구자적 역할과 모범은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역사다. 

사단법인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정서영 목사)은 3.1운동 98주년을 앞두고 지난 23~24일 기독교 역사유적지 순례행사를 가졌다. 순례일정을 듣자마자 동행을 신청했다. 그곳에서 신앙선배들을 만나고 싶었다. 

피맺힌 절규의 현장 서울 ‘서대문형무소’
한교연 순례단이 함께 떠나기 위해 모인 현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운영했던 서대문형무소. 1908년 설립돼 우국지사들을 탄압했던 악명 높았던 장소이다. 
적벽돌로 올라간 담벼락은 시간의 무게를 보여주듯 묵직하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철문을 통과하면 역시 적벽돌로 된 건물들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흩어져 있다. 과연 이곳에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곧바로 수감동에 들어가면 벽면에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와 순국선열들에 대한 기록들이 걸려있다. 역시 그랬다. 외관과 달리 이 안에서는 피맺힌 절규와 억울한 죽음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옥사들이 있는 긴 복도에서는 3.1절을 맞아 드라마가 촬영 중이어서 시선을 끌어갔지만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대문형무소 한켠에 자리한 사형장을 둘러본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과 아들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뒷구멍이나 다를 바 없는 바로 근처 시구문(屍口門)으로 내어졌을 것이다. 시신을 받아든 가족들이 절규할 때도 하늘의 색은 저리도 깊었을까. 깊은 푸른색이 슬프다.

기독교인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당시 감옥에서 출산했던 구세군 임명애 부교와 갓난아이를 지극히 돌봤다는 기록이 떠오른다. 한겨울 오줌 싼 기저귀가 마르지 않아 유관순 자신의 허리춤에 싸매어 말려주었다는… 모유가 부족할까봐 자기 밥마저 또 나누어주었다는…

▲ 한국교회연합은 3.1운동 98주년을 맞아 지난 24~25일 나라사랑, 신앙의 지조가 깃든 기독교 유적지를 순례했다.

 채로 불태워진…화성 ‘제암리교회’ 

서대문형무소에서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떠난 다음 행선지는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서대문형무소에서 느껴졌던 음습함은 어느 새 북적북적한 서울 도심을 헤집고 나오면서 사라졌다. 이동하는 버스에서 동행한 목회자들과 아침으로 김밥을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서울요금소를 지나자 이내 화성 발안IC를 지나 제암리교회에 다다랐다. 잔디밭에는 작은 태극기들이 하트를 만들고 있다. 바로 옆에 순국기념비, 그리고 3.1운동순국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제암리교회는 일제가 우리 백성들에게 가한 가장 잔혹한 현장 중 하나다. 만세운동을 하다 주재소를 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 병력이 23명의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산채로 불태웠다. 탈출하는 주민은 칼로 찌르고 목을 베었다. 

극악한 만행은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릴 정도로 독립에 관심이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에 의해 전 세계에 고발됐다. 그는 불에 타고 남은 뼈조각을 모아 안장해 주었다. 주한미총영사 커티스도 현장을 방문해 본국에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교회에 모이게 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총검과 군도로 생존자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이 엄습한다. 목회자들은 기념관에서 20분간 제암리 사건에 대한 소개 동영상을 보면서 탄식한다. 전시물들을 들여다보면서 반드시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신앙의 지조 지켜낸 강경성결교회
개인적으로 이번 순례길에서 가장 기대되는 곳은 바로 충청남도 강경이었다. 일제가 식량수탈의 근거지로 삼았던 강경. 근대유산이 여전히 남아있고 중요한 기독교 유적지도 이 곳 강경에 흩어져 있다. 

한옥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 그 중 한곳이다. 예배당의 용마루쯤에는 작은 십자가도 걸려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양식이 어땠을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구조다. 

특히 강경성결교회는 신사참배를 끝끝내 거부하다 1943년 총독부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았고, 1924년에는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한 교회로 유명하다. 이후 감리교회가 소유했지만 성결교단과 노력으로 다시 성결교회로 이전됐다. 

재밌는 것은 교회 밖 시멘트 담벼락에 그려진 서투른 벽화와 글씨다. 6·25 동란 중 폭탄이 교회 한가운데 떨어졌지만 불발탄이었고, 교회 강대상 아래 기도하는 목사를 공산군이 보지 못해 살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빛바랜 그림과 글씨로 설명돼 있다.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에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금강이 한눈에 보이는 옥녀봉이 있다. 강경시내의 정겨운 모습도 보인다. 이곳은 기독교한국침례회 최초의 교회 터이기도 하다. 1897년 미국 선교사 풀링이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한 교회로 당시에는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 ‘ㄱ’자 형태로 지어졌다. 옛 터 바로 옆에는 초가로 복원된 ‘ㄱ’자 교회를 볼 수 있다. 

일행은 현재의 강경침례교회 앞에 마련된 신사참배 반대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쳤다.

강경성결교회에서 만난 94세 공희식 장로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는 말도 할 것이 없이 심각했다. 목사님의 고초가 심했다. 그렇다고 믿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면서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여생도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바람이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지금처럼 오래 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약’, 신약과 구약 때문”이라는 노(老) 장로의 농담에 일행은 한바탕 웃는다. 

성숙한 신앙선배들의 김제 ‘금산교회’
순례일정의 마지막 유적지는 김제 금산교회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금산교회는 산골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보로 다닐 옛날에는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사금(砂金) 산지였다고 한다. 

특히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당시 지주였던 조덕삼과 떠돌이 생활을 하다 마부로 머슴을 살던 이자익이 금산교회에 출석해 동시에 장로 후보로 추천된 사건 때문이다. 

투표결과 조덕삼은 떨어지고 이자익이 선출된 것. 양천 구분이 명확했던 시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교회가 갈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덕삼은 결과를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나중에 자신의 머슴 이자익을 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되도록 지원하고 사역도 함께했다. 

현재 금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인수 목사는 “조덕삼의 땅을 빌어 밥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때니까 아마 투표결과에 교회는 숨도 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조덕삼 장로는 예상을 깨고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며 “이것이 지금 분열로 얼룩진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모습”이라고 말했다. 

금산교회 역시 ‘ㄱ’자 예배당으로 당시 목회자는 여성 신도쪽을 향해 4번 이상 쳐다보면 불순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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