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선교사, 제주 입도 기록 실제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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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선교사, 제주 입도 기록 실제와 다르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07.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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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이기풍 선교사역...증손자 이준호 목사, ‘이기풍 목사 관련 연보 오류’ 밝혀
▲ 이기풍 목사의 증손자 이준호 목사가 이기풍목사기념사업회 창립기념 심포지엄에서 그동안 알려진 연보 중 잘못된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초기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이기풍 목사에 대한 일부 연보(年譜)가 잘못돼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1907년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잘못돼 있다며 직계 증손자 이준호 목사가 최근 연구논문에서 공개한 내용이다.

이준호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과 평양신학교 입학일, 제주 선교를 위해 도착한 입도일, 목회사역 등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비교분석했다. 

특히 독노회 파송을 받아 제주도 선교사역을 떠났던 이기풍 목사의 입도일에 대해 제주 성내교회 선교기념비에는 “1908년 정월에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니”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기사와 보고서 등을 보면 실제 입도일은 약 한달 뒤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준호 목사는 “‘예수교회보’는 이기풍 목사가 1월 17일까지 평양에 기거하고 후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7일간 머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월 24일 제물포항에 도착했지만 제주도가 아닌 목포를 방문해 1월 25일부터 31일까지 부흥집회를 인도했다는 내용도 목포선교부 프레스턴 선교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남았다”면서 “또 광주선교부 연차보고서에서는 2월 6일부터 14일간 광주 지도자 훈련반을 인도한 것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기존에 알려진 입도일은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이러한 기록과 당시 월 3회 목포 제주 간 정기항로를 고려할 때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입도일은 1908년 2월 20일~25일 사이일 것이라고 이준호 목사는 추정했다. 
이준호 목사의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호남신대 총장을 지낸 차종순 교수가 관련 내용을 연구해 발표한 바 있다. 이 목사 역시 차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기풍 목사가 차지하는 제주 선교 위상을 고려할 때 연보는 분명히 재검토 돼야 할 필요가 있다. 이기풍 목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돼 척박한 땅에 복음의 씨앗을 전한 신앙의 뿌리와 같은 인물이다. 

이기풍 목사는 처음에는 잠잘 곳조차 없어 한라산 기슭에서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에 보고된 제주도 교세 통계를 보면 예배당이 3처요 기도회 장소가 5처소라고 보고됐다. 학교가 1곳, 교인 수는 세례교인 58인, 학습교인 57인 전체 교인 수는 410인에 이른다. 당시 제주도 환경을 고려하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열정적으로 사역하던 이기풍 목사는 성대가 상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병에 걸려 1915년 노회에 휴식을 청원했다. 

이후 광주 북문안교회에 청빙돼 초대 한인 위임목사가 취임하고 장로 2인 이상이 되는 완전한 당회를 조직했다. 다시 광주제중원(기독병원) 원목, 순천의 중심이었던 순천읍교회 등에 청빙돼 가는 곳마다 부흥성장을 일궈냈다. 1920년에는 제6회 전남노회장,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장에 추대된다. 

이준호 목사는 총회장 이후 1924년 순천읍교회를 사임하고 고흥읍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연보에도 오류가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고흥읍교회에 대한 이기풍 목사에 대한 기록은 그간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교회 이기풍 목사가 직접 기록한 약사와 교세통계표가 발견됐다. 기록에 따르면 재임기간은 그동안 알려진 것 처럼 1925년 6월부터 1929년 4월까지가 아니다. 약사를 보면 1924년 3월 이기풍 목사가 취임했으며, 다시 제주 성내교회 청빙을 결정하고 부임한 때가 1927년 7월인 것을 보면 알려진 내용이 변경돼야 한다. 

이기풍 목사의 성내교회 부임기록도 이기풍 목사가 1928년 6월 5일 전남노회에 제출한 친필보고서가 교회 설립 87주년을 위해 문서를 정리하던 중 발견돼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로 쓰였다. 

이밖에도 이준호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이 1865년 12월 23일로 막내딸 고 이사례 권사의 저서 ‘순교보’에 나와 있지만, 족보와 성내교회 회갑기념예배 사진 속 기록 등을 볼 때 실제 출생일은 1868년 11월 21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출생신고가 늦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기풍 목사의 회심과 관련된 일화는 유명하다.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 시내를 걷고 있을 때 돌팔매질을 했던 이기풍이 훗날 한국교회 최초 목사가 된 것이다. 마펫 선교사가 돌팔매질을 당한 후 턱에 상처가 남았다는 것이 통설로 남았지만,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아 1934년 마펫 선교사가 기술한 내용을 보면 “턱에 흠 있는 것은 돌에 맞아서 생긴 것이 아니며 나면서부터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교회 내에서는 이기풍 목사가 회심 전에는 뚜렷한 직업이 없는 불량배로 알려졌지만, 실제 여러 기록에는 뜨거운 철을 이용해 파이프 자루를 장식하는 직업을 가진 장인이었다. 

한편, 이기풍 목사 연보오류에 대한 이준호 목사의 논문은 지난달 23일 ‘이기풍목사기념사업회 창립총회’ 기념 제1회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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