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 ‘인격적인 만남?’ 예수님이 인격적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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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 ‘인격적인 만남?’ 예수님이 인격적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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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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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 20

*마가복음 8:1-5>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 The Multiplication of the Loaves and Fishes, 조반니 란프란코, 1620~1625

지난 주일이다. 인천 송도에 살면서 그 지역에서 직장을 다니는 한 자매가 나에게 고통스러운 호소를 했다. 이야기인즉, 

-외근을 하고 오는 길에 주민센타에 들려 서류를 발급받는 일을 했는데, 회사 동료에게서 톡이 왔다. ‘보람씨(가명), 어디에요? 빨리 들어와요! 지금 돼지(그 회사에서 직원들이 사장을 부르는 은어)가 찾아요. 왜 아까부터 보람씨가 안 보이냐고 하면서 난리난리 쳤어요.’ ‘돼지가 왔어요?’ ‘그건 아닌데…’ 이 사건 아닌 사건을 계기로 회사 직원들은 기가 막힌 정보를 알게 되었다. 사장이(여 사장임) 회사 사무실에 비밀 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해서 스마트폰이랑 집 텔레비전을 통해서 24시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 누구도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말 못하고 있으며, 여 사장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변태성향이 있어, 화장실이나 탈의실에도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그 회사를 고발할까?’하는 갈등 속에 있다. 이런 행위는 갑질의 범위를 넘어 인권침해 아닌가? 요즘처럼 취업이 힘든 시절에 고용주라는 위치에서 월급이라는 담보물로 젊은이들의 인격을 놀잇감 취급하다니! 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여사장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오, 하나님!

보람씨는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했다. “교회 다니면 누구나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했다.’라는 간증을 수없이 들을텐데 왜 그러죠? 우리 사장은 인격이 없는 건가요? 사장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달라질까요? 사장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은 이런 사실을 알까요? 인터넷에는 알리지 못 해도 그 교회에는 알리고 싶어요!”

한 달, 2백만원 남짓의 월급 때문에 동물원의 동물 취급을 받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지금이 80년대 노동해방을 외치던 시대도 아닌데…공단에서 온갖 억압과 폭력 속에서 야근을 하며 손가락이 잘려도 말 못하는 시절도 아닌데…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 힘이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보람씨도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보람씨와 헤어져 오는 길에 나는 ‘인격적인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있을까? 어느 말씀에서 예수님의 인격적인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늦은 밤에 성경을 열었다. 마가복음이 펼쳐졌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마가복음을 소설 읽듯이 주욱 읽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무너지거나 불안해지거나 괴로울 때에는 미친 듯이 성경을 읽어 내려간다. 수지선한목자교회의 강대형 목사님이 그렇게 문제를 돌파한다는 설교를 들은 뒤부터 생긴 습관이다.- 그런데 8장에 들어서면서 나의 눈이 커졌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었다. 


아무 사례도 받지 않은 채 사흘 동안이나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은 그냥 바람처럼 그들을 떠나도 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정말 별 걱정을 다 하신다. 제자들에게 ‘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다.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냥 보내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내가 보니 아주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으니 큰일이다.’ 만약 그 사람들이 부자들이었다면 예수님이 이런 걱정을 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가면 바로 시장이나 여관이 있으니 얼마든지 돈을 내고 허기를 면할 수 있잖은가. 그러나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하나같이 가난하며 줄도 빽도 없는 사람들인지! 


요즘 시대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면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감시하고, 학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먹을 것, 쓰러질 것, 길이 먼 것 등등 온갖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을 염려하신다. 이보다 더 인격적인 성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고용주라면, 이 정도 말씀을 안다면,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권력으로 힘없는 자들의 눈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는 졸렬하고 야비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함께기도>>>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의 예수님도 좋지만 먹을 것을 걱정해주시는 엄마처럼 누이처럼 다정하고 자상한 예수님을 기억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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