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빨리, 급히 그리고 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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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빨리, 급히 그리고 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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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2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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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 26

*사무엘상25장 18-42>18: 아비가일이 급히(lost no time, 또는 haste, hurried)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quickly)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42; 아비가일이 급히(quickly)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 다윗과 아비가일의 만남,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25/1628년, 캔버스에 유화.

지하철을 타면 대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아이들이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점이다. 남의 아이들이지만 너무 사랑스러워 앙 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희고 작은 손으로 그들이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손가락 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마치 세계 게임선수권대회 출전한 청년들처럼 보일 정도이다.

유아들이 이 정도이니 청소년들은 오죽하랴. 그들은 말을 하면서, 먹고 마시면서, 걷고 차에 오르면서 쉼 없이 빠르게, 빠르게 눈동자와 손을 움직인다. 그러다보니 말도 점점 짧아진다. 내가 학교나 도서관 강연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문장으로 말하는 아이들은 거의 드물다. 예를 들어 ‘과학 속의 사과 이야기를 해볼까?’ 하면 ‘뉴턴이요.’ 이게 다다. 그럼 나는 다시 묻는다. ‘뉴턴이 어느 분야의 학자이지?’ ‘과학이요.’ 그리고 또 끝이다. 나는 또 묻는다. ‘과학? 좋아. 천문학? 생물학? 화학? 어느 분야일까?’ ‘물리학이요.’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교육(education)의 헬라어 어원이 ‘끄집어내다’이듯이 나는 인내심을 갖고 계속 묻는다. ‘그럼 뉴턴이 사과를 통해 발견한 이론을 뭐라고 하나?’ ‘만유인력이요.’ ‘수고했어. 그럼 네가 이제껏 말한 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말해볼래?’ 그제서야 아이는 ‘물리학자 뉴턴이…’하며 겨우 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요즘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무료, 무한정, 무지막지한 3무’ 정보 사회 속에 살다보니 모르는 게 없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표현하는 힘(능력)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궁금하거나 고민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 온갖 것을 알려주고 대답해주는 스마트폰이 손 안에 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문자 메시지나 SNS 세상에서 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건이 벌어진다. ‘날 무시한다 이거지!’ ‘어쭈, 이 인간이 언제부터…’ ‘날 뭘로 보고…’ ‘내가 너한테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잘 난 사람이라면 이럴까?’ ‘나도 너한테 평생 반응 안 한다!’ ‘내 형편이 어려워진 걸 알고 날 무시하는 건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 ‘이젠 너랑 끝이야!’ 

이런 식으로 뭐든지 급하고, 빠르고, 서두르는, 사실 ‘안달(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구는 일)’하며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그 ‘안달’ 속에는 흥분, 불안, 짜증, 두려움, 긴장, 초조, 염려, 부정적 상상, 실망감과 패배감, 열등의식과 미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만은 놀랍게도 여유만만이다. 교회마다 예배 시작 전에 본당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한다고 협박(?)을 해도 그들의 느리고 느린 마음과 발걸음은 황제의 행차처럼 당당하다. 시간을 쪼개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월을 아끼며 살라고 해도 일상의 우선순위는 스마트폰이나 드라마나 걱정거리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루에 단 15분이라도 기도하라고 목회자들이 목에 피가 나도록 호소해도 커피 마시는 시간조차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당장 내가 급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반응은 천 년 뒤에나 와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러다가 암처럼 무서운 병이 걸리거나, 취직이나 대학 입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가정이나 일터에 예상치 못한 경제적 난관이 일어나거나 감당하기 힘든 관계의 문제 등등 도저히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나게 되면 소리소리 지른다. 왜 빨리 응답 안 하시나요? 어찌하여 입을 다물고 게시나요? 언제까지 나를 고통 속에 두실 건가요!

겨우 24절의 말씀 속에 급히, 빨리, 지체없이 움직이고, 행동하며, 반응하는 아비가일을 보며 거룩한 분노감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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