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는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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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동자는 안녕하신가요?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8.09.04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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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59
▲ 렘브란트, 부분, 1648~1654년경

마태복음 5: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내가 규모 있는 삶을 위해 안 하는 일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자 메시지를 제외한 모든 SNS 안 하기, 텔레비전 안 보기, 그리고 자동차 운전 안 하기’이다. 물론 ‘혼자 사는 작가’라는 남다른 생활구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안 하고도 살 수 있기는 하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살면 불편하지 않냐? 또는 당신 때문에 우리가 불편하다며 농담도 하고, 힐난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나의 생활법칙에 익숙해지고 맞추어준다. 그것은 마치 앞을 못 보는 사람과 소통과 교제하려면 결국은 앞을 보는 사람이 그에게 맞추어줘야 하는 것과 같으므로!

특히 운전을 하지 않으므로 생기는 ‘즐겁고 짜증나고, 놀라고 황당한’ 일들은 어느 드라마나 광고를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인간에 대한 깊고 다양한 통찰을 갖게 해준다. 이러던 중 나는 한 달 전부터 새로운 습관을 갖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습관을 만든 것이다. 그 계기는 지하철 속에서 생긴 한 가지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지난 8월, 평택에서 강연을 하고, 일산을 향해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강연장소에서 집까지 거의 왕복 6시간. 더구나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날, 늦은 오후. 그래도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영어 성경이다. 공공장소에서 성경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책을 펼치면 온갖 일이 일어나는 불쾌한 경험을 했기에 전혀 성경인지 모르는 디자인으로 된 영어 성경을 읽는다. 

그런데 자꾸 두 귀가 불편하고, 머릿속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성경을 쳐다본 채 두 귀로 소리를 추적하니 바로 내 옆자리의 여성이 껌을 씹는 것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직감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법.

나는 무례하게 껌을 씹는 여성을 향해 두 눈으로 경고를 보낼까 했다. 늘 그래왔으니까. 공공장소에서 상식 밖의 언행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경멸 1,000kg, 멸시2,000kg, 무시 3.000kg 등등 온갖 미움과 조롱의 눈길 1만kg 정도는 상대방에게 마구 쏟아부으면서 한편 나의 교양을 드러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옆자리 여성에게 한껏 질책의 눈길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 속에 강한 울림이 퍼졌다. ‘성경을 읽으려면 단 한번도 그 여자를 쳐다보지 말아라. 만약 네가 그 여자를 쳐다본다면 성경을 가방 안에 넣고 집에 갈 때까지 펼치지 말아라!’ 

나는 택해야 했다. 잠시 주춤하던 나는 전자를 택했다. 여자든 나든 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절대로 여자를 쳐다보지 않고 성경을 읽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몇 분 안되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자의 껌 씹는 소리는 변함없이 우렁찼는데, 내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면서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이 자매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오늘이라도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만약 구원받은 자매라면 그 믿음이 더욱... ...’ 그래서일까? 그 여자가 먼저 내릴 때까지 나는 그 소리가 거북하지 않았다. 또, 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조차 보지 않은 채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그 날 엄청난 나의 죄를 깨달았다. 평생 나의 두 눈동자는 악을 담고 세상과 사람을 저울질해 왔다는 것을. 교양과 예의의 이름으로, 질서와 규칙의 잣대로, 어설픈 지식과 허울만 고상해 보이는 지혜의 총알로, 작가라는 이름과 기독교인이라는 명함으로, 내 관습과 경험과 심지어는 기호를 근거로! 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악의 눈화살, 편견의 눈의 칼, 오만의 눈 총알을 쏘아댔을까! 

도대체 몇 살 때부터 내 두 눈동자는 감히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사람들을 항해 창을 던지고 조롱한 것일까? 다섯 살? 세 살?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내 두 눈동자는 주님 보시기에 그 얼마나 악독하고, 더러우며, 썩은 생선 눈보다 더 냄새나고 토악질이 날까?

그러면서 예수님의 두 눈동자가 떠올랐다. 새벽닭이 울기 전 베드로와 마주친 예수님의 두 눈동자, 마지막 동전 하나 조차 아낌없이 헌금하는 여인을 바라보던 눈동자, 어서 너의 일을 하라며 가롯 유다를 쳐다보시던 눈동자,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시던 눈동자, 생산과 떡을 구워 놓고 제자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시던 눈동자,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던 핏물로 범벅이 된 그 두 눈동자. 예수님의 눈동자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그 날 이후로 나는 몸부림치며 나를 훈련시키고 있다. 팔복의 눈동자를 갖자! 심령이 가난한 눈동자, 애통하는 눈동자, 긍휼히 여기는 눈동자... ...

 

함께 기도

하나님, 우리 두 눈을 지켜주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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