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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에서의 개혁 운동

기사승인 [1463호] 2018.12.05  13: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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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뱅은 1538년 9월부터 1541년 여름까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칼뱅은 주로 목회와 상담과 저술로 시간을 보내며 개혁의 견문을 넓혔습니다. 칼뱅은 여기서 일주일에 4회 설교를 하고 매일 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아 책을 구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힘들게 생활 했습니다. 얼마간 지난 후 스트라스부르 상원은 사례를 주었는데 겨우 살아갈 정도였습니다.

칼뱅은 이곳에서 부처와 교제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부처의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 의식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겼습니다. 특히 교회 음악에 있어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 찬송을 더 선호하여, 시편 중 18개를 작곡하였고, 찬송을 편집하여 ‘찬송가’로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찬송을 기도와 함께 공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칼뱅은 공적인 기도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배 사상은 나중에 개혁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었습니다. 

칼뱅은 부처의 영향으로 교회 연합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였습니다. 칼뱅은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어디서나 누구하고도 협동할 수 있다는 것과 자유로운 협동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이와 같은 칼뱅의 주장은 부처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3년간 머물면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1539년 최초의 성경주석으로 ‘로마서 주석’을 간행하였고, ‘기독교강요’ 개정판을 내고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서신’과 ‘기도서’ 그리고 ‘성찬론’을 각각 집필하였습니다.

1540년 칼뱅은 베자의 소개로 세 자녀를 둔 과부 이델레트 드 부레와 결혼하였습니다. 이델레트는 네델란드에서 박해를 피해 온 재세례교도였으나 부처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신앙으로 개종하였습니다. 결혼동기에 대해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성의 미에 사로잡혀 그 여성의 허물에 키스하는 부류의 망령된 사람이 아니다.

이델레트가 나를 끌어당긴 매력이란 그녀가 겸손했고, 친절했으며, 악의가 없었고, 알뜰하며, 참을성이 있고 나의 건강을 돌봐줄만한 점이었다.” 
그들은 1542년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태어난 지 두주 후에 일찍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칼뱅은 사랑하는 친구 비레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기서 당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주님께서 우리 어린 아들을 데려가심으로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로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자녀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자녀가 없음을 비방할 때, “나는 무한히 셀 수 없는 영적인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응수하여 자녀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칼뱅과 결혼한 이델레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549년 사망하였습니다. 후에 칼뱅의 대적들은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고 악평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칼뱅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며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고 결혼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성공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황의봉 목사 igoodnews@igoodnews.net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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