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주의적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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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적 개혁운동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9.01.1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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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138)프랑스의 개혁운동(2)

프랑스의 개혁 운동의 두 번째 시기는 칼뱅주의자들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연대적으로는 1536년부터 1560년까지입니다. 칼뱅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위그노’라 부르는데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프랑스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시기입니다. 

칼뱅은 제네바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동족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1536년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를 그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고, 프랑스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국가로 개혁될 것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수많은 개혁자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적인 신앙에 호응하거나 이미 복음 편에 서 있는 나바르의 앙리, 콩드의 왕자, 콜리니 제독 등과 같은 시민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개혁 운동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1547년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심해졌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있는 성직자들, 종교재판소, 세속 법정, 최고 법원까지 동원하여 종교개혁자들을 색출하고 투옥시켰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칼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위그노’들의 세력은 농민보다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아갔습니다. 위그노들은 목사의 지도 없이 개인의 집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를 위하여 모이기도 했습니다.

파리에 사는 라 페리에라는 사람은 어린아이가 로마가톨릭 신부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것보다는 기독교 목사에 의해 세례 받기를 원하였으나, 파리에는 기독교 목사가 없어 300마일이나 떨어진 제네바에 가야만 하였습니다. 페리에는 동료들과 함께 모여 조심스럽게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타진한 후, 회중 가운데서 목사, 장로, 집사들을 선택하고, 목사로 하여금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안에 칼뱅주의적인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인 수가 많아지자, 위그노 지도자들은 제네바에 있던 칼뱅에게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개혁 운동은 점차 각 지역으로 퍼져 갔고, 교회마다 제네바에서 훈련을 받은 목사들로 채워졌습니다. 참신한 목사들이 교회를 담임하게 되자, 지도적인 사회 인사들이 속속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1559년 앙리 2세가 사망하고, 그 해 3월에는 ‘샤토 칼브레지 평화회의’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프랑스의 캐더린 메디치, 영국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조인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를 손아래 넣으려던 프랑스의 노력이 실패하자, 프랑스 왕실은 국내 문제 해결에 주력하면서 교회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굳건한 조직체를 구성하여 힘을 키워 나아갔습니다.

칼뱅의 제자인 앙뜨안드 샹듀 목사의 노력으로 개혁자들은 1559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파리에서 50여 개의 교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파리 대회는 앙뜨앙느 샹듀의 ‘신앙고백’과 ‘권징 규칙서’를 프랑스 교회의 신조와 헌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종교개혁이 번성하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가까운 리용과 부르타니에서 더욱 흥왕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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