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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의 종교개혁

기사승인 [1477호] 2019.03.19  1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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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종교개혁(7)

헨리 8세는 마침내 남성 후계자를 세 번째 아내 제인 세이모어에게서 얻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에드워드였습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어린 왕자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왕이 되었지만 건강 면에서는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병약했습니다. 처음 3년은 삼촌인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세이모어가 섭정을 하였습니다.

이때 종교개혁은 큰 진전을 보았습니다. 그를 보좌한 크랜머 대주교와 귀족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개신교식으로 평신도들에게도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하트포드와 서머셋 공작이 왕을 보좌하게 되었고 에드워드 치하의 제1회 국회에서 헨리 8세가 종교개혁사상가들을 처벌했던 ‘여섯 가지 신조’를 폐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서 번역과 출판을 제한했던 법을 없애 자유롭게 하였고, 종교개혁 서적의 간행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출판과 판매뿐 아니라 주석에 대한 모든 제한은 철폐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서 성상(聖像)들이 철거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성상 타파의 과격한 운동으로 교회당의 모든 성상이 없어졌습니다. 


크랜머는 ‘제1예배지침서’를 발행하여 예배의식을 개혁하였고, 예배 때 영어 성경에서 복음서와 서신을 반드시 읽게 하였고, 성전에 있던 성상들 가운데 역사적이고 가치 있는 것만 보존하였습니다. 신부에게 사적으로 고백하던 고백행위는 금지하고 공중 앞에서 하는 고백을 허용하였고, 라틴말로 드리는 미사는 존속시켰습니다. 

이때 독일 스트라스버그에서 한때 칼뱅과 동역하던 마틴 부처가 영국에 와 있었는데 그에게 교회 개혁의 한 직책을 맡겼습니다. 성만찬 의식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서 미사를 폐지하는 문제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신부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1549년에 ‘통일법령’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크랜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공동기도서’에 따라 신부들이 교회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여 혼란을 막았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신학을 따라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습니다.

국회에는 보수주의자들이 있어서 로마 가톨릭교회 예배의 전통을 고집하였으나 크랜머가 작성한 예배지침서는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성만찬 의식과 예배의 좋은 점들을 살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1552년에 발표한 ‘제2기도서’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와 십자가 그리기와 신부의 제복과 성상에 관한 기도와 교회법을 폐지하였습니다.


1553년에 ‘42신조’가 제정되어 영국 교회의 신조가 되었는데 이것도 크랜머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서머셋의 뒤를 이은 노섬벌랜드 공작은 더욱더 극단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크랜머는 대륙의 개혁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마틴 부처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1551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 추진되어 갔지만 영국 국내에는 옛날 가톨릭교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런던과 동남부 지방에 살던 상업 종사자들은 유럽 대륙에 가까워서 개혁운동에 더 많이 동조하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황의봉 목사 igoodnews@igoodnews.net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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