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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족의 구원과 해방에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기사승인 [1477호] 2019.03.20  15: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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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④ 균형적 신앙인의 삶, 길선주 목사

▲ 길선주 목사

평양신학교를 처음으로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7명 중 한 사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폭발적인 대부흥 역사를 일군 부흥사. 백만인구령운동을 제안하고 새벽기도회를 처음 시작해 전국 교회에 전파한 목회자. 모두가 길선주 목사(1869~1935)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자 평가이다. 

길선주 목사를 떠올리며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1919년 독립선언서에 기독교계를 대표해 서명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실제 투옥돼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선주 목사는 최근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놀랄만한 일이다. 우리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길선주 목사가 이처럼 뒤늦게 역사적 평가를 받은 것은 억울할 일이었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길 목사의 독립운동과 애국정신을 조명하고 신앙인들이 나갈 바를 찾아본다. 

90년 만에 인정받은 독립유공
길선주 목사는 1919년 2월 14일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평양기홀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승훈 장로에게서 3.1 만세시위 전모를 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즉각 수락했다. 미리 잡혀있던 집회 일정 때문에 도장을 우선 만들어 서울(경성)로 보냈다. 장대현교회와 평양 전도부인회 간부에게는 평양 만세운동을 위해 태극기 수천 장을 비밀리에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으며 실제 평양만세운동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길선주 목사의 독립 유공을 인정받는 데  왜 이토록 오랜 시일이 걸렸던 것일까. 국가보훈청 보훈록에 따르면 “3월 1일 당일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관계로 지체되어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서울 도착 즉시 곧바로 종로경찰서에 달려가 동지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등으로 무죄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 길 목사는 황해도 장연읍교회에서 일주일간 집회를 마치고 2월 28일 서울로 향했지만 거사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3월 1일 오후에야 경성역에 도착해 곧바로 종로경찰서를 찾아가 자진 체포되었다. 이후 무려 1년 7개월간 투옥돼 고초를 겪다 무죄로 석방됐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유일한 무죄 석방이었다. 당시 경성복심법원은 길선주 목사가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판결한 것이다. 

일제는 무려 1년 7개월이나 감옥에 가두어놓고도 길 목사를 무죄 석방했다. 독립운동 진영을 이간질하는 결과를 만들고자 했던 듯하다. 이것이 걸림돌이 되어 길선주 목사의 애국애족 삶은 긴 세월동안 평가받지 못했다. 결국 후손들이 사료를 보완하고 보완한 끝에 처음 독립유공자를 신청한 1977년으로부터 32년, 3.1운동 때부터 90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수 있었다. 

▲ 1910년 이전 길선주 목사의 가족사진으로, 장남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길선주 목사 본인과 차남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복음 향한 목회사역은 계속 됐다
독립운동을 하며 길선주 목사는 가족, 특히 자녀들이 받았을 고통에 큰 상처를 입었다. 장남 길진형은 일제가 한일합방을 앞두고 기독교계 민족진영을 박해하기 위해 자행했던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끝내 사망했다. 

차남 길진경 목사 역시 평양에서 ‘독립신문’ 제호로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실으며 만세운동을 격려해 1년 6개월 복역했다. 길 목사는 차남의 투옥 소식과 나머지 두 남매의 도피 소식을 감옥에서 들어야 했다. 아버지의 심경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대현교회에서는 부인회 소속의 한영신 권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만세시위에 불이 붙었고 평양시내 전역에서 만세외침이 이어졌다. 평소 길선주 목사가 신앙 안에서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나라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남 길진경 목사는 훗날 “아버지는 형과 아버지를 따라 순수한 애국정신을 실천하였다는 것에 반가움과 아울러 포악무도한 왜놈의 손에 고문당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더 다가가 아픔을 기도로 승화시켰다”고 회고했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길선주 목사는 옥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일만번 이상 읽으며 자신의 말세론을 정립했고, 석방돼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전국을 순회하며 요한계시록과 말세론을 강독했다”며 “일제는 말세론을 일제의 종말을 암시한다고 경계하기도 했다”고 그의 후반기 목회를 설명했다. 

장대현교회 청년 일부는 무죄 석방된 길 목사를 비난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빠진 교인들로 인해 장대현교회가 분란이 일어난 적도 있다. 하지만 길선주 목사는 묵묵히 목회를 감당하며 강단을 지켰다. 말씀과 기도에서 나오는 신앙의 저력, 삶으로 모범을 보였던 목회자는 그렇게 25년 목회사역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전국을 다니며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복음을 전했다.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평서노회 도사경회를 인도하는 마지막 날 새벽집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곧 향년 66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겼다. 

누군가는 길선주 목사를 보수적인 신앙에 매달려 세속에서는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길선주 목사는 내세와 현세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을 먼저 살았고 보여주었던 선각자였다. 

이상규 교수는 “그는 일생 동안 1만7천번 이상 설교하고 연인원 380~500만명이 그 설교를 들었고 설립한 교회는 60여개 처에 달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는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며, 민족을 사랑했던 애국자였다”면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 소망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현세적인 민족의 구원과 해방에 무심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강변교회 김명혁 원로목사는 “혹자는 길선주 목사가 천국소망에 치우쳐 현세의 중요성을 부인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판”이라며 “그분은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천국을 바로 보고자 했던 신앙인”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독립유공자 추서는 길 목사의 균형잡힌 신앙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선명한 기회였다.  

이인창 기자 tackle21@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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