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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시대

기사승인 [1484호] 2019.05.15  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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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영국의 청교도 운동(2)

1603년 엘리자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헨리 7세의 증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제임스 6세)이었으므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제임스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를 항상 외국인처럼 대했기 때문에 영국을 다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왕은 요한 낙스와 조지 부커넌과 같은 이들로부터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영국에 오자 국교회의 원리를 받아들였고 감독들과 대주교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에 대한 더 많은 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천 명의 성직자들이 교회 개혁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청교도 목사들은 교회 내 가톨릭적 요소를 제거하라고 요구했고 영국도 스코틀랜드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왕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듬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왕이 의장인 회의에서 청교도들이 장로교에서 쓰는 ‘노회’라는 말을 사용하여 왕을 화나게 했습니다. 감독들이 장로가 되면 왕은 물러나야 한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회의는 중단되었고 곧 300명의 성직자들이 국교회에서 직책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처럼 회의는 중단되었지만 전혀 쓸데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왕이 새로운 성경 번역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1611년 소위 흠정역이란 성경이 나왔습니다. 요즈음에 ‘킹 제임스’ 역본이라고 불리는 성경입니다. 

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청원이 왕에 의해 거부되자, 교회 개혁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개혁을 막는 영국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 교회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칼뱅주의 신학 전통에 서 있어서 영국 교회 안에 교회의 표지가 있는 한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교회의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브라운의 영향을 받은 헨리 야곱을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은 그릇된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분리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왕은 얼마간의 국정경험이 생기자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새롭게 더 부과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614년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구성된 의회는 전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은 세금만으로 버텨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교들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임스의 사위인 개신교도 보헤미아 국왕 프레더릭은 국토와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지만 제임스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민들에게 비겁자로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제임스는 태자를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청교도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황의봉 목사 igoodnews@igoodnews.net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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