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치열했던 현장의 중심에 신학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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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치열했던 현장의 중심에 신학도들이 있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05.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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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5.18 참여했던 신학도 문용동 전도사·류동운 열사 조명
▲ 통합 사회봉사부 사회문제위원회가 지난 16일 5.18에 참여했던 문용동 전도사와 류동운 열사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1980년 5월 18일.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향해 총탄이 쏟아지던 아픔의 현장에 신학도들이 있었다. 당시 호남신학교(현 호남신대) 3학년 휴학 중이던 문용동 전도사와 한국신학대(현 한신대) 2학년이던 류동운 열사는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 시민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통합 사회봉사부 사회문제위원회는 지난 16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5.18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도들’을 주제로 교회와 사회 포럼을 열었다.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총무 도주명 목사와 장신대 이치만 교수, 고재길 교수가 발제를 맡아 기독교인으로서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해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문용동 전도사(1952~1980)는 5월 18일 계엄군의 군홧발에 학생과 시민이 쓰러져 가는 것을 목격했다. 항의하는 목사들에게도 여지없이 군홧발 세례가 날아들었다. 21일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고 현장에서 시민 54명이 숨졌다. 이날 시민들은 도청을 점령했고 문용동 전도사는 자원해서 무기고관리를 맡았다.

문용동 전도사는 22일 일기에서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우린 후세에 전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게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남겼다. 그는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3발의 총탄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휴교로 집에 내려와 있던 류동운 열사(1960~1980)는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과 시위를 하다 연행돼 상처와 멍이 가득한 채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다시 21일과 23일 금남로로 나갔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아버지를 향해 류 열사는 “다른 집 자녀들이 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 하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 합니까?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때 신념이 흔들리지 마시고 붙잡지 말아 주세요”라며 거리로 뛰쳐 나갔다. 그리고 그 역시 27일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행동에 미치는 기독교의 종교적 동기의 가치’를 주제로 발제한 도주명 목사는 “문용동과 류동운 두 신학생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죽음으로 가르쳐 줬다. 그들은 사랑과 정의를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으로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이치만 교수는 ‘5.18과 한국기독교 연구를 위한 시론’을 주제로 발제하면서 “한국교회가 그동안 신앙과 사회적 실천이 다르다고 선을 그어온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렇게 되면 문용동 전도사와 류동운 열사의 죽음마저도 기독교 신앙과 전혀 관련 없는 죽음으로 치부해버린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프로테스탄트로 불리는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사회 변동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면서 “문용동과 류동운의 행동은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게 사회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가치문제에 그리스도인으로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해 순교했던 본회퍼 목사와 문용동 전도사를 비교한 고재길 교수는 “두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지 않았고 행함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며 “이들의 모습은 삶과 신앙이 일치하지 않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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