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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경찰서보다 한 곳의 예배당을 세우겠다”

기사승인 [1488호] 2019.06.11  16: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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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기독교 건국론 내세운 백범 김구

방황하던 청년 김구, 다양한 종교·사상 거쳐 기독교인으로 회심

해방 후 ‘기독교 건국론’ 내세워…“김구가 조국 통일 위한 대안”

▲ 1921년 신년하례회에 함께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백범 김구(1876~1949)가 숨을 거둔 해인 1949년 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 남긴 글이다.

임시정부 휘하에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고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으며 후에는 임시정부 주석까지 맡아 민족의 독립에 일생을 바쳤던 김구. 해방 후에는 38선을 베고 쓰러질 각오로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 고군분투했던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이후 혼란의 시기에 경찰서 열을 세우기보다 하나의 교회를 세우자고 외쳤던 백범 김구의 신앙과 그가 꿈꿨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봤다.

 

▲ 백범 김구 선생

동학·불교를 거쳐 기독교인으로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했던 일생만큼이나 종교 경력도 평범치 않다. 김구가 처음 발을 들였던 종교는 다름 아닌 동학. 1893년 김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평등주의에 이끌려 동학에 들어갔다. 바로 다음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 내 한 무리의 지도자인 접주를 맡아 700명의 동학농민군을 편성해 선봉대로 관군과 싸웠다.

1896년에는 황해도 안악군에서 을미사변과 관련 있다고 확신했던 일본인 쓰치다를 죽여 사형을 선고받는다. 극적으로 살아남아 2년 만에 감옥에서 도망 나온 이후부터는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도망자 신세로 전국을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이유라기보다 탈옥 후 피신을 위해 사찰에 갔을 거란 추측이 우세하다.

혼란과 격동의 20대를 보냈던 김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8세 때의 일이다. 1903년 11월 세례를 받은 그는 그해 12월부터 평양의 겨울사경회 등에 참석하며 적극적으로 성경과 교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지역 계몽과 교육운동에 활발히 참여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30세도 되지 않았던 젊은 김구가 이토록 많은 종교와 사상을 두루 거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최기영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김구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향한 열망에서 단서를 찾는다. 청년 김구는 종교 그 자체에 감회돼 여러 종교에 입교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사상과 공간을 찾아 방황했다는 것. 하지만 종교를 수단으로 삼았던 그의 태도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해방 후 기독교 건국론 내세워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김구의 감옥생활도 시작된다. 1911년 무관학교 설립과 관련한 안명근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4년 동안 서울과 인천 등지에 수감된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고문을 받을 때 찬송가를 부르면서 모진 시간을 견뎌낸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구의 모친과 부인 역시 한 두 달에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면회를 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출옥 이후에도 김구에게 맘 편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주어지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면서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하기까지 기나긴 타국 생활이 시작됐던 것이다. 김구는 광복 이후 망명생활을 돌아보며 사람이 많은 곳에 밀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이 때문인지 김구의 신앙과 기독교 가치관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것은 광복으로 조국에 돌아온 이후부터다. 1945년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김구는 첫 주일인 25일을 정동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로 시작한다. 이후 매일 새벽 6시면 자신의 사저로 찾아온 김치선 목사와 새벽예배를 드렸고 주일 성수를 소중히 여기며 남대문교회에 출석했다.

해방 이후 기독교 국가를 꿈꿨던 김구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이때부터다.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과 미군환영 행사에서 김구는 ‘반석 위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연설에서 “경찰서 열 곳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한 곳을 세우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확고한 신앙과 국가관을 밝힌다.

“나는 건국대업을 앞두고 두 가지 방침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건국이요. 둘째로 건교(建敎)입니다. 종교 교화한 나라는 어떠한 강국이라 할지라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서 열을 세우는 대신 예배당 하나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신 오직 이 성경 말씀에 의지해서 삼천만 동포가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이니 무엇이니 보다 먼저 모두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정병들입니다. 이 땅의 천국을 건설하는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구의 삶과 신앙, 기념만 해선 안 돼

이렇듯 김구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해방된 조국에 이뤄지기를 간절히 꿈꿨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김구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와도 절친한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김구 연구자 홍원식 박사는 저서 ‘영웅 백범’에서 “백범은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매일 새벽 예배를 드렸던 크리스천이었다”면서 “주일 성수를 소중히 여겼던 김구였기에 남북 화합 논의를 위해 김일성을 만났을 때도 공산당 치하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소개했다.

남북 분단 위기에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던 김구의 단호한 신념 역시 아직도 둘로 갈라진 채 하나가 되지 못한 조국과 수백 개의 교단으로 나뉜 지금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홍 박사는 “김구의 신앙과 정신이야말로 조국의 진정한 통일을 일궈낼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라면서 “김구는 조국 땅에 떨어질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죽음마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제 백범의 신앙과 사상을 기념하고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현구 기자 hhg@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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