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웃 돌보고 희망 주는 교회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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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이웃 돌보고 희망 주는 교회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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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0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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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평신도·일산광성교회


지표가 없는 바다에서 배가 똑바로 나가기를 바란다면 하나의 목표를 설정
한 후 그것을 보고 가면 되지만, 한 편으로는 배가 지나온 뒤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나온 궤적대로 나타나는 물살 모양이다. 한 해를 보내고 2005년 새 해를 맞으며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은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지난 한 해를 뒤돌아 보게 된다.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 아담의 아들들이다. 가인은 첫째로서 아버지의 제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장자였고 아벨은 둘째였다. 형은 농사를 지었고 동생은 양을 치는 목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을 하게 된다. 이 살인 사건에는 의문점이 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이 시기가 노아 홍수 이전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양을 쳤던 목적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의 털이 필요해서였다.

인간이 육식을 하게 되는 시기는 성경의 기준으로는 노아 홍수 이후이다. 때문에 우리가 알듯이 아벨이 양을 잡아 제물을 드림은 그가 먹을 곡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 중요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동생 아벨을 돌보지 않았던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와 성도는 최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실로 참담한 소식을 접했었다. 대구에서 발생한 ‘장롱 속 5세 아이의 죽음’이다. 지금도 가슴이 절절히 아파오는 이 사건은 죽어간 아이의 부모가 제도적 사각지대에 있던 차상위 계층이라는 측면에서 어린아이의 죽음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 사회가 저지른 사회적 살인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 교회로서는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어린 영혼들이 부모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희생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었던지를 한국 교회는 알고 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수효는 1천3백만 명을 헤아린다. 이러한 수치는 인구의 1/4이라는 의미와 함께 교회가 사회적 범죄와 부패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 숫자적 의미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1/4이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힘, 범죄 방지와 부패 척결을 위해 한국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숫자적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5만 여 한국 교회가 빛을 발해야 하는 새해가 밝았다. 이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가슴을 치고 회계해야 한다. 성장이 가져오는 그늘 속에서 현재 한국 사회는 분배의 문제를 놓고 계층 간에 서로 갈등하고 있다. 모든 빈곤의 문제가 제도적 보완만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여기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이 땅에 도덕적 순결을 선포하자. 교회에서부터 편법과 불법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를 통해 얻은 부를 빈곤층을 향해 토해내자. 마땅히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구해야 한다. 경제적 순결을 선포하자. 부유하고 정보가 빠른 자들은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해서는 안된다. 가난하고 알지 못하는 자의 기회를 도적질해서는 안된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는 더 이상 복음과 상관없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주일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묻고 계신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한국 교회가 돌보아야 할 동생은 가난한 이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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