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 ‘지적인 설계’가 아니고는 설명 불가능하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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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 ‘지적인 설계’가 아니고는 설명 불가능하다고 주장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4.04.2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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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_(54)지적설계 운동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길”(the fifth way)은 신존재증명과 관련하여 목적론적 논증을 소개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지적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은 이러한 목적론적 논증의 현대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설계에 대한 고전적인 실례를 제공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칼라일의 부주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로 알려져 있다. 페일리는 『자연 신학; 혹은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거들』(Natural Theology; or Evidences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1802)이라는 책에서 유명한 ‘시계공’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하고 있다. 만약 시계가 존재한다면 그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특별히 페일리는 인간의 눈의 구조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매우 발달된 것이기에 지적인 설계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페일리의 주장을 현대의 지적설계 운동에서도 채택하고 있음은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즉 생물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근거하여 설계론자들은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곤 한다.

이러한 페일리 류의 지적설계론에 대해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일각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다윈이 이러한 지적설계이론을 반대하기 위해 진화론을 주장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윈은 지적인 존재로서의 신의 설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설명 즉 진화론으로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였다. 

『만들어진 신』(God the Delusion, 2006)으로 유명한 옥스퍼드의 무신론적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 1986)의 부제는 “진화의 증거가 설계 없는 우주를 드러내는 이유”이다. 즉 그 책의 주된 공격 목표가 바로 지적설계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도킨스는 우리가 ‘설계의 환상’을 떠올리는 이유가 어떤 구조들을 볼 때 일단 너무 복잡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구조들이 우연히 나타났을 리가 없다고 너무나 쉽게 간주해버리는데 이에 대해 도킨스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복잡한 기관이 그것보다 훨씬 단순한 것에서 진화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킨스의 이러한 지적설계이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1953~ )는 도킨스가 『눈먼 시계공』에서 기독교 신앙 전체는 아니지만 18세기 영국 국교회가 취했던 입장, 즉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 신학』에 근거한 설계이론을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맥그라스는 소위 말하는 ‘지적설계 운동’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맥그라스가 보기에 지적설계 운동은 페일리의 『자연 신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이해 속에 있는 ‘틈새들’(gaps)에 신을 상정한다.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하는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신을 평가나 연구의 영역 너머 우주의 숨겨진 구석에 강제로 다시 자리매김”을 하는 전략을 맥그라스는 과학적 이유로도 신학적 이유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 전략을 지적설계 운동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망상』, 47).
맥그라스는 불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의 접촉점 중의 하나로 ‘우주의 질서’를 들면서 생각하는 것은 평판이 나쁜 ‘하나님 끼워 넣기’나 ‘틈새를 메우는 하나님’ 전략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기독교 변증가 사이에서 애용되는 보다 건전한 접근법은 자연과학적으로 ‘비어진 쪽’(open)보다 과학적으로 ‘채워진 쪽’(given)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을 위한 기독교변증: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리』, 91f).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내게 있어 자연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상상력 넘치는 천재성을 정말 찬란하게 증명하고도 남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필립 얀시는 소위 설계 논증이 결정적일 수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자연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연이 보여 주는 증거들은 양면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55).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적 논증의 한 아류라 할 수 있는 지적설계 운동이 갖는 한계들에 대해 알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적설계 운동이 전혀 무가치한 운동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성적인 논증들과 마찬가지로 설계이론 또한 불신자들까지도 완전히 잠재울 수 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요, 나름의 긍정적인 가치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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