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79년 이후 53개 교단으로 분열
상태바
개혁, 79년 이후 53개 교단으로 분열
  • 송영락
  • 승인 2005.10.13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복잡해진 `개혁` 난맥상 진단
 ‘개혁’이란 이름을 교단명칭으로 사용하는 교단은 53여개에 이른다. 이는 1980년 ‘개혁’이란 이름을 교단명칭으로 사용한 이후 26년 만에 진행된 분열사다.

‘개혁’의 뿌리는 합동이다. 79년 합동으로부터 이탈한 호남측목사들(정규오목사가 중심)과 같은 이유로 이탈한 합동보수측목사들(최선재목사가 중심)이 합동하면서 ‘개혁’이라는 교단이 탄생시켰다. 개혁총회는 보수신학과 교단개혁을 주장하면서 성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두 교단의 합동으로 시작된 개혁총회는 79년 합동과 분열한 개혁합신과 합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이견을 좁히지 개혁합신총회가 반대함에 따라 개혁총회와 완전한 합동을 이루지 못하고, 개혁합신의 일부가 개혁과 합동했다.


이 때부터 교단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어느정도 큰 규모로 성장한 개혁은 아쉽게도 1984년 교권문제로 정규오목사와 최선재목사가 갈라졌다. 정규오목사는 개혁으로, 최선재목사는 합동보수란 이름으로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개혁’이라는 교단명칭을 내걸고 산발적으로 성장한 교단들은 1997년 교단대통합을 시도했다. 여기에 참여한 교단은 합동보수, 호원, 냉천동측, 신림측, 국제, 개혁 등 9개 교단으로 ‘개혁연합’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학교문제와 교권문제로 ‘개혁연합’은 2년6개월 만에 분열하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총회 때, 교권을 놓고 몸싸움을 벌이면서 결국 개혁국제(고병학목사 그룹)와 개혁(조경대목사 그룹)이라는 크게 두 그룹으로 갈라졌고, 호원, 합동보수들은 다시 끼리끼리 모였다.


여기서부터 ‘개혁’을 사용하는 교단은 23개로 갈라졌다. 먼저 개혁은 ‘친조’와 ‘반조’로 갈라지면서 정규오목사와 총신대출신이 중심하여 개혁(광주측)을 설립했고, 조경대목사와 개신원 출신들은 개혁(서울측)을 설립했다.


또 개혁(서울측)은 방배동측(정영민, 황호관, 박만수목사)과 길음동측(조경대목사)으로 갈라지고, 방배동측은 광주측과 합동했다. 이 그룹의 일부가 지난 9월 합동총회에 복귀함에 따라, 개혁교단수호측은 개혁총회를 설립했다. 마찬가지로 길음동측도 ‘개신’과 ‘시흥’으로 갈라져 새로운 살림을 차렸다.


개혁국제(고병학)도 자체분열을 시작했는데 ‘개혁국제(조경한목사)’와 ‘개혁연합(엄신형목사)’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살림을 차렸고 개혁연합은 또다시 분열을 시작, 안양개혁, 개혁총연으로 갈라졌다. 이번 총회를 통해 호원(신응균목사)도 개혁총연과 갈라섰다. 마찬가지로 개혁국제도 개혁국제(한창영목사)와 합동보수(최선재목사)로 따로 살림을 차렸다.


이로써 26년 만에 50여 교단으로 갈라져, 80년 이후 개혁은 장로교의 분열을 주도했다. 80년 이후 분열하지 않은 기존교단과 달리 핵분열을 거듭한 개혁교단의 분열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권의 문제였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