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부흥의 길] 에드워즈, 전인적 변화 위해 ‘가슴으로’ 말씀을 깨닫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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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과 부흥의 길] 에드워즈, 전인적 변화 위해 ‘가슴으로’ 말씀을 깨닫게 해
  •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원로)
  • 승인 2024.04.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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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수 목사와 함께 찾는 ‘한국교회 회복과 부흥의 길’ (10)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델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원로목사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원로목사

조다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노스햄톤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교인들은 마른 뼈’(dry bones) 같았다. 경건의 형식만 있을 뿐, 경건의 능력이 없었다. 겉으로 보면 나무랄 데 없이 존경스러웠지만, 기계적인 정통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녀들이 배교(背敎)해서 술집을 전전하고 마약에 빠져 있었지만, 부모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교회 출석도 잘하고 헌금도 봉사도 잘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잘 믿는 것 같은데, 경건의 모양뿐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마른 뼈같은 교회에 1734년 성령의 쏟아부으심이 있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부모에게로 돌아왔다(4:6).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청년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의 진리를 조명해 주신 것이다. 모호하던 신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선명한 매개체로 변했다. 세속적 관심과 탐욕이 사라졌다. 장사하는 교인들도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하나님과 영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찬양은 의무가 아니라 환희가 되었다. 억지로 전도하던 교인들이 전도에 적극 나섰다.

교인들은 말씀을 듣고 죄에 빠져 있는 모습을 스스로 깊이 깨달았다. 단편적인 죄의 문제보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데서부터 불신앙, 이기주의, 질투, 기타 복잡한 죄들이 유발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죄로 부패한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믿음으로만 되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란 말씀을 전했을 때작은 각성이 시작되어서 영적인 지진으로 발전했다. 3개월 안에 성인 교인 중 절반이 회심을 고백했고, 나머지는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마을 전체가 사랑과 기쁨이 가득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꽉 찼고, 교인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해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기쁨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설교가를 어떻게 했기에 그런 변화를 일어났을까? 에드워즈의 설교를 두고 흔히 감지(感知)의 레토릭’(rhetoric of sensation)이라고 한다. 청중에게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가슴으로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청중의 가슴을 터치해서 영적인 실재들과 만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특징은 가슴의 감지”(sense of the heart)에 있다.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으로 전해서 (살전 1:5) ‘가슴으로 깨닫게해 준 것이다. 지성으로 진리를 제공하고 의지로 선행(善行)을 지향하게 하되, 마음으로 깨닫게 해 준 것이 중요하다. 지정의(知情意) 전인(全人)의 변화를 위해 가슴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

에드워즈가 목회한 노스햄톤 교회는 당시 보스톤 바깥에서는 교세도 가장 크고 영향력도 가장 컸다. 에드워즈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선명하고 뜨겁고 엄숙하게 말씀을 전해서 교인들을 각성하게 했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평가한 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가장 위대한 미국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면서도 가장 위대한 목회자 겸 부흥사. 무릎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으로 전해서 가슴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도 엎드려 기도해서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으로 예수 생명의 복음을 전하되, 가슴으로 깨닫게 하신 감지(感知) 설교가 필요한 것이다. 말씀에 깊이 파고들면서도 가슴을 터치할 수 있는 깨우침의 설교가 필요하다. 꿀이 달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꿀맛을 보고 청중에게 꿀맛을 보여주는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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