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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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0.12.0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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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학회ㆍ기독교역사학회 ‘공동학술발표회’ 개최 … 1910년 한국 교회와 일본의 동향 조명

한국 선교사들, 제국주의 특성 ‘인종적 우월주의’ 벗지 못해
선교활동 중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에 대해 순응ㆍ협력하기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가 치러진 1910년을 전후해서 한국 교회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한국교회사학회(회장:이후정 교수, 감신대)와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한규무 교수, 광주대)가 주최하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김흥수 박사)가 주관한 ‘공동학술발표회’가 지난 4일 오후 2시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진행됐다.

‘1910년 한국 교회와 세계교회의 동향’을 주제로 진행된 이번 공동학술발표회는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중심으로 당시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비롯해 한국 교회와 일본의 관계, 해외선교사들의 한국과 일본의 선교적 입장 등이 조명됐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를 중심으로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해 발표한 안교성 교수(장신대)는 “한국 교회 기원은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라는 거대한 맥락가운데 이뤄졌고,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선교지와는 달리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변형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즉, 서구선교와 서구제국주의의 관계라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서구선교와 비서구제국주의의 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축정돼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주제”라며 “특히 1910년은 에든버러대회가 개최됐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됐던 해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빼놓고 한국 교회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당시 선교와 제국주의 관계는 어땠을까? 안 교수는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선교와 제국주의를 동일시하는 태도다. 이 경우 선교는 제국주의의 동맹 혹은 앞잡이가 된다. 결국 제국주의의 종말은 곧 선교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성을 부인하거나 혹은 최소화하려는 태도다. 이 경우 선교와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연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당시 선교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선교와 제국주의의 간접적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양자 관계의 복잡성을 강조하는 태도다.

이유야 어찌됐든 1910년 에든버러대회는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개최됐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제7분과위원회를 주제로 삼은 안 교수는 “에든버러대회는 선교기관과 정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대회였다”고 분석했다.

특히 에든버러대회는 선교기관과 정부의 관계를 서구역사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의 관계, 혹은 유럽의 교회역사 및 시민역사의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실용적인 회의를 추구했으며, 기독교국가와 비기독교국가, 문명국가와 비문명국가로 나누는 등 문명화의 사명을 공유하고, 선교기관과 정부의 관계를 주로 서구의 관점에서 봤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에서 사역했던 서구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안 교수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주로 선교의 편이성 혹은 선교의 가능성이란 관점에서 살펴봤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당시 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선교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모두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비기독교적 성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낸 선교사도 있었다”고 언급하고,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고 염려했던 것은 일본의 비기독교적 성향이지 일본제국주의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를 포함해 모든 제국주의는 선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못하는 현상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한국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인 온정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안 교수는 “이러한 온정주의적 태도는 사역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났다며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특성인 인종적 우월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렇다면 일본정부와 서구선교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안 교수는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1905년 한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1910년 식민지로 병합했다”며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 열린 에든버러대회에서는 사실상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 “서구선교는 일반적으로 일본정부를 기독교의 협조자로 간주했지만 이런 이해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며 “일본의 기독교 관용은 일본의 친서구적 경향이나 친기독교적 경향보다는 오히려 반서구적 경향에서 비롯된 역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과 선교사’를 주제로 발표한 김승태 박사(세계선교신학대학 강사)는 보다 실제적으로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분석했다.

김 박사는 “당시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와 선교부의 권고로 될 수 있는 한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부패한 한국 정부 관리의 행패나 선교사의 지나친 선교 열정에서 조약의 규정을 무시하고 선교구역을 확장하거나 부동산을 매입해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일본 세력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전쟁 중에 일어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인을 보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일제의 만행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초기에는 관망하는 자세를 가지고, 한국인의 배일적 행동에 대해서도 제재했다는 것이 김 박사의 주장이다.

김 박사는 “선교사들은 외적으로는 일제의 회유와 선교부의 선교정책 및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내적으로는 유아기의 한국 교회와 신도들을 보호하고, 선교활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점차 일제에 순응, 협력했다”며 당시 선교사들이 가졌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설명했다.

‘1910년 전후의 일본교회 동향’에 대해 발표한 서정민 교수(연세대)는 “일본 기독교 수용자들은 국가 및 사회의 분위기에 저항하고 대결하는 입장을 세우기보다는 철저히 순응하고 포섭되는 적응주의의 진로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일본의 기독교회는 신교자유 획득의 순간부터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제한을 보였으며,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해 최고의 종교적, 신념적 권위를 양보해야 함은 물론 신앙, 포교, 조직의 모든 과정이 ‘천황의 은사’라고 하는 범주 안에서 고백되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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