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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의 낙스

기사승인 [1492호] 2019.07.09  1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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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5)

장로교를 지원하던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존 낙스는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도망하였는데 거기서 존 낙스는 생애 가장 위대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낙스가 프랑스 해군의 갤리선 노트르담호에 강제로 승선되어 중노동을 했지만, 이 배가 루앙과 낭트에 정박할 때는 육상 근무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칼뱅주의를 알게 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제네바를 방문한 낙스는 칼뱅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낙스는 칼뱅의 예배 모범서를 본 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습니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습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 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습니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습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이후 칼뱅과 낙스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밀접하게 나누었는데 칼뱅은 낙스의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사 계급인 지도층 위그노들과 그들을 따르는 상인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칼뱅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폴란드,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 칼뱅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낙스는 직접 간접으로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사상 체계와 신학의 폭을 넓혔습니다. 

낙스는 1555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습니다. 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영국에 들어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1558년 낙스는 칼뱅과 의논도 하지 않고, ‘여인의 괴수 정부에 대한 첫 번째 나팔 소리’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이 책자는 개신교를 박해하는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의 메리’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여인의 국정 관여와 통치행위의 부당성을 탄핵한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습니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습니다.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습니다. 1559년 5월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황의봉 목사 igoodnews@igoodnews.net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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